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영화 (문단 편집) === 초창기 및 중화민국시기 === 중국에 [[활동사진]]은 1896년 소개되었고, 최초의 영화는 1905년 [[광서제]] 시절 [[경극]]을 필름에 담은 《정군산》이었다. 바로 [[황충]]이 [[하후연]]을 토벌하는 경극을 그대로 필름에 담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중국이 혼란에 접어들기 때문에 본격적인 영화의 본거지는 정변으로 바람잘날 없던 수도인 [[베이징]]이 아니라 [[상하이]]가 된다. 상하이는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조계]]가 있는데다가 정변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영화 제작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1913년에 상하이에서 제작된 30분짜리 《난부난처》가 경극과 무관한 본격적인 중국 영화였다. 1920년대부터 상하이에 자리잡은 여러 영화사들이 작품을 내게 되며었고, 1931년부터는 유성영화가 나오게 되었다. 1930년대 [[장제스]]가 중국을 어느 정도 통일하면서 일단 안정기에 접어들고, 상하이의 영화산업은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이 당시 주류를 점했던 영화들을 좌익영화(左翼电影)라고 하는데, 중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시선과 함께 점증하는 일본의 침략을 강하게 경계하는 작품, 그리고 [[봉건제]]에 얽매인 [[여성]]의 고난을 다룬 작품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는 명작들이 대대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게다가 상하이는 서방 여러 나라의 [[조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위치한 영화사들인 영국령 [[홍콩]]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국민당 정부로부터 창작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때를 중국 영화의 제1차 황금기라고 한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하이는 곧 [[일본군]]에 함락되고 영화인들은 장제스 정부를 따라 [[충칭]]이나 일본의 손이 미치지 않는 [[홍콩]]으로 도피하거나 아예 영화 제작을 그만두었다. 상하이의 외국 [[조계]]에 위치한 영화사인 신화영화사는 일본군이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작품을 냈고, 《무란종군》(木蘭從軍)[* [[뮬란]]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이라는 애국 작품을 냈으나,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상하이의 외국 조계도 삼키면서 더이상 영화제작을 할 수 없었다. [[중일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고 1945년 상하이가 해방되자 중국 영화는 제2차 황금기를 맞는다. 이 당시에도 제1차 황금기와 마찬가지로 사회성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코미디, 로맨스 등의 상업적인 영화들도 나와 흥행을 이끌었고, 곤륜영업공사(昆仑影业公司)나 문화영업공사(文华影业公司) 같은 메이저 스튜디오도 나왔다. 1948년에 나온 《생사한》(生死恨)은 중국 최초의 컬러 영화지만, 경극을 그대로 촬영한 것이었다. 이 때 대 활약한 배우가 바로 조선 출신의 [[김염]]이었다. 허나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에는 이런 상업영화들이나 사회성 있는 영화들이 나오기 힘들어졌다. 상당수 영화인들이 국민당보다는 공산당에 가까운 성향이었지만, 공산당은 집권 후 사회 비판이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영화를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